밥 아이거의 ‘4분’ 스펙을 스토리로 바꾸다
6월 5일 애플 MR헤드셋 비전 프로 발표장에 등장한 디즈니 CEO 밥 아이거. 4분 간 찰나였지만 느낌은 가장 강렬. 디즈니와 애플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스트리밍에 대한 관심도 집중돼.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순간
애플이 지난 2023년 6월 5일 공개한 MR헤드셋 ‘비전 프로(Vision Pro)’는 과거 VR헤드셋과는 개념이 전혀 다른 기기로 보입니다.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기기라기 보다, 기존 PC를 대체하는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을 향한 디바이스(Device)입니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통해 현실 라이프의 모든 생활을 가상 공간에서 즐길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헤드셋 소개를 위한 30여 분의 데모(전체는 2시간)에도 모든 시간이 가상 공간에서 일을 하고 페이스타임을 통한 텔레커뮤니케이션, 홍채 인식을 통한 애플리케이션 작동 등에 설명이 집중됐습니다.
과거 애플이 디즈니 ‘만달로리안’과 애플 TV+의 ‘Prehistoric Planet’의 수석 프로듀서 존 파브로(Jon Favreau)와 헤드셋을 통해 시청할 수 있는 VR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5일 프레젠테이션에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VR헤드셋을 통한 가상공간을 확대하기 위해선 이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필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애플 워치가 2015년 처음 공개됐을 때 시계에서 쓸 수 있는 3,000개 앱이 공개됐지만 정작 유용한 것이 없다는 비난이 재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나 기기는 정확한 용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메타로선 아쉬운 결과겠지만 메타의 VR헤드셋이 2022년 1,000만 대 판매를 돌파한 이유도 상당수가 게임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거의 4분..스펙을 스토리로 바꾸다]
그러나 상황은 밥 아이거(Bob iger) 디즈니 CEO가 애플 행사장에 등장한 이후 완전히 반전됐습니다. 행사장 모든 흐름도 바뀌었습니다.
애플 임원으로 가득 찬 현장에 엔터테인먼트 거물의 등장은 강력한 충격을 줬습니다. WWDC에서 디즈니가 제공한 이런 시각적 효과는 거실을 뛰어다니는 AR 3D 버전 미키마우스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밥 아이거가 비전 프로와 함께 즐기는 디즈니+와 콘텐츠를 소개하자 사람들은 ‘VR헤드셋에서 즐기는 스트리밍 서비스’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밥 아이거 등장만으로 VR 엔터테인먼트의 중요성에 대한 확실한 강조가 되는 순간인 셈입니다.
아이거가 등장한 시간은 4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플의 연간 글로벌 개발자 컨퍼런스(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의 시선을 팀 쿡에서 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거물(entertainment mogul)인 밥 아이거는 개발자들에게 이렇게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례적인 현상입니다. 아이거는 가장 중요한 조연이었던 이유는 비전 프로가 새로운 플랫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거는 카메오였지만 파급효과는 주연 이상이었습니다.
비전 프로가 스트리밍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이 되고 이 경험이 비전 프로를 살릴 수 있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VR헤드셋의 방점이 스펙에서 스토리로 진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VR회의론자’들의 마음까지 흔들고 있습니다.
디즈니는 비전 프로가 엔터테인먼트 가상현실로 가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 아이거 메시지는 혁신적이었습니다. 비전 프로를 통해 구현될 디즈니 스트리밍은 특별한 경계 제한이 없었습니다. 밥 아이거는 “디즈니+구독자들은 ‘비전 프로’를 통해 가장 좋아하는 스토리들을 과거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데모 화면에서는 가상 공간에 떠있는 디즈니+ 앱과 이를 클릭해 보는 ‘경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이 만달로리안 행성에 들어가서 콘텐츠를 보는 몰입형 경험은 압권이었습니다.
이에 콘텐츠 사업자들도 애플의 비전 프로가 매우 기다려지는 상황이 됐습니다.(뉴스와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맥스 영상을 모바일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비전 프로의 스트리밍 비전은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2024년 1월 판매와 동시에 디즈니+를 쓸 수 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기능이나 스펙, 콘텐츠는 오픈되지 않았습니다.
공간 컴퓨팅에서의 콘텐츠 시청은 여전히 많은 궁금증을 낳고 있습니다. 공간 컴퓨팅에서 비디오와 오디오 콘텐츠가 어떻게 작동되고 오디언스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가장 큰 관심사지만 현장 그림 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디즈니는 마블 시리즈 ‘왓 이프(What if)’를 VR버전을 공개했지만, 소비자들이 버전 프로를 통해 가상현실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좋아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가 아닌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역시, ‘블랙 미러(Black Mirror)’, ‘베어 그릴(Bear Grylls)’ 시청자들에게 결정권을 제공하는 인터랙티브 드라마, 영화를 공개하고 있지만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다.
애플 비전 프로에서 작동되는 디즈니+는 넷플릭스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할 수 있지만 대중적 성공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증강현실 시각적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효과를 약속했던 매직 리프(Magic leap)가 있었습니다. 실사와 가상 현실을 결합한 헤드셋을 만드는 스타트업입니다.
그런데, 매직리프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도 결국 B2C에서 B2B마켓으로 전환했습니다. 매직리프의 문제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스토리가 없었던 겁니다.
[스펙이 아닌 스토리를 강화하는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결국 중요한 것은 시장의 선택입니다. 시장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디즈니+의 비전 프로는 세상을 바꿀 것 같았던 구글 글래스나 3D TV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메타는 2019년 가상현실 소셜 미디어 플랫폼 페이스북 호라이즌(Horizon)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데 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회사 사명을 메타(Meta)로 바꾸면서 까지 배수의 진을 치고 있지만 여전히 적자입니다. 메타의 고전은 가상현실을 상업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를 보여줍니다.
[메타와 애플의 다른 점 ‘할리우드’]
메타는 애플 비전 프로가 나오기 하루 전, 자사의 보급형 MR헤드셋 퀘스트3(Quest3)를 공개했습니다. 애플의 비전 프로는 메타 제품의 7배 가격인 만큼 퀘스트에 없는 스펙(Spec)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메타에는 없고 애플에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밥 아이거(Bob Iger)의 지원입니다.
디즈니가 애플과 손을 잡은 이상, 저커버그는 데이비드 자슬라브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 CEO나 쉐릴 레드스톤 파라마운트 글로벌 CEO 등의 할리우드 거물과 협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도는 아이거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밥 아이거는 애플의 오랜 우군입니다. 아이거가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디즈니, 아이폰과 콘텐츠 공급 첫 번째 계약]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공개했을 때도 디즈니는 애플과 자사의 영화와 TV콘텐츠를 스마트폰에 공급하는 첫 계약을 했습니다.
디즈니를 잡은 아이폰은 콘텐츠 유통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애플은 디즈니의 도움이 절실해 보입니다. 애플은 편당 1.99달러로 다운 받는 디지털 구독 모델을 도입했지만 결국 넷플릭스가 들어오면서 모든 시장은 스트리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메타는 할리우드와 손을 잡을까요? 정답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들의 메타버스와 애플의 메타버스는 다르다고 답했습니다. 여전히 시청보다는 교감에 관심이 많은 메타입니다.
저커버그는 ‘애플의 VR데모 영상이 혼자서 제품을 조작하고 개인이 소파에 앉아서 앱을 두드리는 영상 뿐’이라고 비아냥댔습니다.
VR헤드셋은 장기적으로는 TV를 넘어 극장까지 위협하는 새로운 유통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기술도 그렇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상 공간의 정의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갈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이 속도를 견디면서 시장을 만들어갈 한국 콘텐츠 사업자들이 있을까요. 적어도 뉴스에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