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CNN '속보(Breaking News)'와 결별 선언. '신뢰' 시대 개막 선언
CNN, 6월 3일 보도 스타일 매뉴얼에 '속보(Breaking News)' 선정 관련 내용 추가. 앞으로 속보 남발 자제하고 특별한 뉴스 없으면 한 시간 이상 속보 배너를 이어가지 않는다는 내용 추가. 이와 함께 스트리밍, 소셜 미디어 시대 앵커 중심으로의 의견 뉴스에서 팩트 중심의 사실 뉴스로 전환.
워너미디어(WarnerMedia)와 디스커버리(Discovery)가 합병해 만들어진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WarnerBrosdicovery)는 CNN의 모회사입니다. 글로벌 1위 뉴스 미디어 CNN도 합병의 파고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합병 직전 9년 간 CNN을 이끌었던 제프 저커(Jeff Zucker)가 부하 직원과의 연인 관계를 회사에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임했고 NBC와 CBS에서 일했던 크리스 리히트(Chris Licht)가 새로운 CEO로 영입됐습니다. 또 디스커버리는 워너미디어를 합병하자마자 CNN이 3억 달러를 투자해 준비했던 유료 뉴스 스트리밍 서비스 CNN+를 한 달 만에 중단시켰습니다.
[리히트 신임 사장, 시청률 보다 신뢰도]
이제 CNN의 새로운 주인들은 CNN의 뉴스 내용에도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CNN 새로운 대표가 된 크리스 리히트는 6월 2일 자신들의 보도 스타일북에 ‘속보(Breaking News)’ 가이드라인을 추가한다고 밝혔습니다.
방송에서 속보가 발생했을 때 보통 배너(Banner)를 띄우는 데 이 기준을 명확히 한 겁니다. 이제 CNN의 ‘속보 자막 및 화면 배너’는 특정 레벨 이상(대규모 총기 사건, 허리케인, 글로벌 리더의 사망 등)의 뉴스에만 붙으며 한 시간 이내로만 노출됩니다.
이 속보 뉴스 가이드라인은 CNN 보도국장(bureau chief) 샘 파이스트(Sam Feist)이 주도한 팀이 만들었습니다.
리히트 CEO는 관련 성명에서 “우리는 시청자들에게 알람이 아닌 정보에 집중하며 사실을 말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이미 프로그램에서 '속보' 배너를 많이 줄였다”고 제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리히트 CEO는 CNN이 속보 배너(Breaking News)’를 지나치게 남발한다는 CNN 조직 내부와 외부 사람들의 불만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리히트는 “속보 뉴스가 너무 지나칠 경우 결국 시청자들의 관심이 떨어져 (속보가 발생하더라도) 오디언스가 모이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리히트는 “‘속보’는 그야 말로 뭔가 대형 뉴스를 의미하는 것(Breaking News” mean something BIG is happening)”며 “우리는 패드백을 받고 있고 향후에도 기준을 계속 수정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리히트와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 CEO 데이브드 자슬라브(David zaslav)는 CNN인수 이후 뉴스 미디어의 운영 방침을 ‘의견’ 뉴스에서 보다 전통적인 방식인 ‘팩트’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트럼프와 각을 세우던 진보 진영의 수호자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앵커들의 강한 매력과 이들의 팬덤,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높이는 CNN 앵커 시스템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전임자 제프 저커(Zeff Zucker)였습니다.
하지만 리히트는 취임 이후 시청률(Ratings) 보다 신뢰도(Credibility)를 앞세웠습니다. 모회사 CEO 자슬라브도 CNN이 중도를 지향하길 원합니다. CNN은 4,500명 직원에 현재 11개 글로벌 총국에 28개국에 특파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CNN 디지털의 월간 평균 순수 방문자(MAU)는 2억 명에 달합니다.
디스커버리의 주요 주주이자 자슬라브의 멘토인 미국 케이블TV업계 대부 존 말론(John Malon)도 “CNN이 논평이나 의견 뉴스에서 다시 팩트 기반 하드뉴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자슬라브는 “우리(CNN)는 중요하고 연관성이 있어야 하며 전세계 오디언스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커 시대의 폐막,리히트 시대의 개막]
리히트는 CNN 경영 스타일을 바꾸는데도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저커는 CNN 뉴욕본사 뉴스룸에 주로 머물렀지만, 리히트는 뉴욕의 허드슨 본사에 주 사무실을 구축했습니다.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는 과거 워너미디어와는 달리 CNN을 팩트 중심의 전통 저널리즘 언론사로 운영하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직원이 5,000명에 가까운 CNN을 경영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프로듀서로 주로 일한 리히트는 지금까지 이런 큰 조직을 이끌어본 적이 없습니다. 리히트가 맡았던 토크 프로그램 CBS의 ‘The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는 직원이 20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일부 CNN기자들은 그가 좋은 시절을 떠나 힘든 경쟁을 시작한 글로벌 뉴스 방송사를 경영할 능력이 있는 지에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프 저커는 CNN에선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마이크로 매니저(micromanager)’이기도 했습니다. 뉴스 헤드라인을 결정했고 방송 중에서 앵커들의 인이어(In Ear)를 통해 인터뷰 내용을 지시했습니다. 또 앵커 중심의 강력한 팬덤을 의미하는 ‘Audience of One’ 문화를 키웠습니다. 출연자들에게도 저커는 스포츠 앵커 스타일의 마이크를 씌웠고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다졌습니다.
제프 저커의 말은 법이었고 가끔은 액션 영화나 드라마처럼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앵커들도 제프 저커에 높은 충성도를 보였다. 저커의 퇴장 이후 앵커들은 동요했고 돈 레몬(Don Lemon)과 같은 앵커는 방송에서 "우리는 이 회사의 중추이자 접착제이자 정신이었던 한 남자를 잃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송별사를 전하기도 했다.
부정적인 면도 컸습니다.
제프 저커는 CNN 뉴스 프로듀서와 기자들을 매우 수동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저커의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늘 저커가 내려주는 특별 임무를 기다렸던 뉴스 제작진들은 지금의 자율성을 혼란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수동성은 스트리밍 시대, 능동적인 뉴스 시청자들을 대응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리히트의 경영 스타일은 정반대입니다. 리히트는 저커가 만들었던 쇼맨 리더십(Showman Leadership)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리히트는 근무 첫 날 직원들에게 “나는 편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끌 CNN은 다를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율주의 뉴스 경영과 전통 케이블TV뉴스 철학과의 결별 선언은 아직 CNN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낯설다. 이에 더 많은 설명과 실천이 필요했습니다.
리히트도 이런 비난 여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리히트는 속보 뉴스 경쟁을 포기하면서 직원들에게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천히 의사 결정을 할 것”이라며 “나는 지난 4개월 간(제프 저커 퇴임, CNN매각) 여러분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안들의 모든 면을 파악한 뒤 느리지만 사려 깊게 결정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리히트는 우선 메시지보다는 포맷을 바꾸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리히트는 CNN 아침 프로그램 ‘뉴 데이(New Day)’를 개혁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뉴데이는 제프 저커의 유산입니다. 그동안 리히트는 NBC의 ‘모닝조(Morning Joe)’, ‘CBS This Morning’ 등을 맡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왔습니다. 리히트는 광고주들에게 아침TV 프로그램을 혁신 하길 원한다며 좀 더 매력적이고 대화적인 접근을 프로그램에 접목시키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 CNN 리히트는 먼저 일요일 아침 크리스 월래스(Chris Wallas)가 진행하는 인터뷰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롱 폼 기업 관련 리포트(longer-form enterprise reporting) 등 아침뉴스 프로그램을 다양한 코너들이 합쳐진 뉴스매거진 행태(newsmagazine)로 바꾸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정규 인터뷰 프로그램 ‘friends of the show’을 만들어 미국 공영라디오 NPR에서 영입한 인기 앵커 오디 코니쉬(Audie Cornish)에게 진행을 맡길 계획입니다. 코쉬는 당초 CNN이 운영했던 유료 뉴스 스트리밍 서비스 CNN+를 위해 영입된 인물입니다.
리히트 CEO는 CNN의 메인 뉴스 격인 오후 9시 뉴스 진행자와 관련 여러 명의 앵커가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인기 앵커였던 크리스 쿠오모(Chris Cuomo)가 진행하던 자리였지만 형인 전 뉴욕주지사 쿠오모(Cuomo)의 성추행 무마를 함께 모의했다는 이유로 앵커직에서 하차했습니다. 정규직 앵커가 하차했지만 대체자를 임명하는 대신 집단 앵커체제를 도입한 겁니다.
회사 경영 경험이 없다는 내부 우려에 리히트는 자신의 외부 조력 집단을 운영 중입니다. 리히트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들 중 가장 가까운 인물은 친구 크리스 마린(Chris Mariln)입니다. 마린은 미국 플로리다에 본사를 둔 거대 주택 건설업체인 레나(Lennar)에서 일했던 인물로 리히트와는 수십 년 친구입니다. 이 둘은 미 전역 고등학생 대상 행사였던 1989년 워싱턴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광고 이외 다른 수익원도 찾고 있습니다. 리히트는 CNN의 쇼핑 가이드 및 상품 비교 서비스 ‘CNN Underscored’를 미국에서 중국 등 해외로 확대했습니다.
[균형 잡힌 방송 뉴스=새로운 광고주 영입]
균형 잡힌 프로그램 개혁은 상업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리히티의 새로운 임무는 CNN의 수익성 강화입니다.
뉴스 시청률 하락과 관련 리히트는 내부 동료들에게 공정한 뉴스(fair-minded news outfit)로의 CNN 명성을 강화하는 것이 새로운 광고주들을 끌어오는 기본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5월 리히트는 뉴욕 광고주 설명회 ‘업프런트(Upfronts)’에서 “극단이 케이블TV뉴스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다른 길로 간다(At a time where extremes are dominating cable news, we will seek to go a different way.)”고 말했습니다.
이어 리히트는 미국 워싱턴에 근무하는 CNN 프로듀서와 기자들과 면담에서도 ‘다양한 시각을 담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 뉴스에 지금 보다 더 많은 공화당과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광고를 하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내부적으로는 그는 최근 텍사스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CNN이 진행한 텍사스 공화당 하원의원 댄 크렌쇼(Dan Crenshaw)와 다나 바쉬(Dana Bash) 인터뷰를 균형 잡힌 사례로 칭찬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의 경쟁이 낳은 속보 전쟁]
CNN을 포함 전통 저널리즘이 속보 뉴스를 남발과 팬덤 뉴스로 진화된 것은 소셜 미디어 서비스와의 경쟁 영향이 가장 큽니다. 실시간으로 팩트 뉴스를 전하는 소셜 미디어 서비스에 앞서려면 TV나 언론사 인터넷에서도 속보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뉴스 속보(breaking news)’나 ‘특종(Scoop)’의 경우 스트리밍과 소셜 미디어 시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정보의 확산이 매우 빠르고 공개 이후 경쟁사들도 보다 빠르게 따라올 수 있습니다. 지금 CNN은 ‘속보 배너’를 수 시간 동안 계속해 띄워 놓고 있다. 뉴스가 발생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도 앵커들이 최신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도 계속해서 배너는 방송에 나갑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사실상 모든 뉴스가 속보가 됩니다.
물론 속보 남발은 CNN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경쟁사 때문에 속보 배너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 2019년 CNN의 제프 저커 CEO는 “모든 TV방송사들이 마찬가지”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제 방송 미디어들이 속보 경쟁에 자유로워질 때가 됐다는 보고 있습니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 방송 저널리즘 대학 학장 마크 펠드스타인(Mark Feldstein)은 “비장한 음악과 그래픽으로 속보 뉴스 소개를 남발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CNN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아마 이 변화가 시청자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또 “뉴스 제작진이 '속보' 배너를 많이 사용한 것은 더 극적인 발표가 더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러한 과대광고를 금방 알아차리고 이를 회피하는 법을 바로 배운다”고 덧붙였습니다.
아울러 진영을 대변하는 뉴스 시대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 서비스가 뉴스의 극단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CNN의 향후 방향성은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30세 이하(미국 설문조사) 10명 7명은 이미 소셜 미디어 서비스를 뉴스 소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방송 뉴스를 보지만, 속보는 소셜 미디어 입니다. 또 방송 뉴스는 유튜브 만큼 적나라하게 솔직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CNN의 제왕이었던 제프 저커의 트럼프 공격은 시청률이나 화제성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높은 시청률로 보상받았고 진보 진영의 대변자라는 CNN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떠난 이후 CNN은 다시 고전하고 있다. 시청률은 바닥이며 CNN 뉴스 미디어 권위에 대한 신뢰도도 의심 받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시대, 방송 뉴스 저널리즘은 위기입니다. 팬덤 비즈니스가 중요하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고 속보와 혁신적 포맷은 이미 소셜 미디어에 넘겨준 지 오래입니다. 이런 위기에서 살아 나올 수 있는 길은 잔기술이 아니라 전쟁의 틀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어려울 수록 신뢰는 기본입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의견 표현은 성질 급한 소셜 미디어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새로운 디지털 뉴스 포맷에 너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더 중요한 건 ‘현재 오디언스들의 변화하는 디지털 콘텐츠 소비 트렌드를 따라 가는 작업’입니다.
30대 이하 모두가 혁신적 콘텐츠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